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두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소리였으면.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를 걸을 때였지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딪친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소리를 내는 순간한강, 어깨뼈
그 옛날 난 타오르는 책을 읽었네
펼치면 순간 불이 붙어 읽어 나가는 동안
재가 되어버린 책을행간을 따라 번져가는 불이 먹어치우는 글자들
내 눈길 닿을때마다 말들은 불길 속에서 곤두서고
갈기를 휘날리며 사라지곤 했네 검게 그을려
지워지는 문장 뒤로 다시 문장이 이어지고
다 읽고 나면 두 손엔
한 움큼의 재만 남을 뿐놀라움으로 가득 찬 불놀이가 끝나고 나면
나는 불로 이글거리는 머리를 이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곤 했네그 옛날 내가 읽은 것은 모두 불이었고
그 불 속에서 난 꿈꾸었네 불과 함께 타오르다 불과함께
몰락하는 인생을이제 그 불은 어디에도 없지
단단한 표정의 책들이 반질반질한 표지를 자랑하며
내게 차가운 말을 건넨다네아무리 눈에 불을 켜고 읽어도 내 곁엔
태울 수 없어 타오르지 않는 책만 차곡차곡 쌓여가네식어버린 죽은 말들로 가득 찬 감옥에 갇혀
나 잃어버린 불을 꿈꾸네남진우, 타오르는 책
1.
흩어진 그림자들, 모두
한곳으로 모이는
그 어두운 정오의 숲속으로
이따금 나는 한 개 짧은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걸어 들어간다
쉽게 조용해지는 나의 빈 손바닥 위에 가을은
둥글고 단단한 공기를 쥐어줄 뿐
그리고 나는 잠깐 동안 그것을 마져볼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나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작은 이파리들을 떨구지만
나의 희망은 이미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어두워지면 모든 추억들은
갑자기 거칠어진다
내 뒤에 있는 캄캄하고 필연적인 힘들에 쫓기며
나는 내 침묵의 심지를 조금 낮춘다
공중의 나뭇잎 수효만큼 검은
옷을 입은 햇빛들 속에서 나는
곰곰이 내 어두움을 생각한다, 어디선가 길다란 연기들이 날아와
희미한 언덕을 만든다, 빠짐없이 되살아나는
내 젊은 날의 저녁들 때문이다
한때 절망이 내 삶의 전부였던 적이 있었다
그 절망의 내용조차 잊어버린 지금
나는 내 삶의 일부분도 알지 못한다
이미 대지의 맛에 익숙해진 나뭇잎들은
내 초라한 위기의 발목 근처로 어지럽게 떨어진다
오오, 그리운 생각들이란 얼마나 죽음의 편에 서 있는가
그러나 내 사랑하는 시월의 숲은
아무런 잘못도 없다2
자고 일어나면 머리맡의 촛불은 이미 없어지고
하얗고 딱딱한 옷은 입은 빈 병만 우두커니 나를 쳐다본다기형도, 10월
시인을 몇 알지는 못하지만, 시를 탐독했다고도 다독했다고도 할 수 없지만
내가 아는 한국작가 중 가장 영상적인 시의 세계를 보여주는 기형도 시인.
기형도 전집을 손에 넣고 감동에 서려 책을 보기만 해도 애틋하던..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五十)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이십(二十)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십사야전병원(第十四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앞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二十)원 때문에 십(十)원 떄문에 일(一)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一)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나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도덕적 양심
잊지말자.
<박찬욱의 오마주>는 책 제목에서 밝히고 있듯이 박찬욱이 사랑하는 영화들의 짧은 리뷰들로 이루어진, ‘영화’ 라는 매체 전반에 바치는 오마주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목차를 살펴보면 재미있는 구석을 발견할 수 있는데, 소개하려는 영화의 소제목 타이틀을 다른 영화의 제목을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목차에 달린 ‘타이틀 ㅡ 영화제목’ 만을 보더라도 박찬욱 자신이 영화를 어떤식으로 이해하고 읽었는지 그 관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또한 다른 영화 비평가들의 비평집이나 리뷰모음과 다른 점은 책의 마지막 구성에 ‘내가 좋아하는 영화 best10, 과대평가된 영화 10′ 과 더불어 ‘엔딩크레딧’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 개론서나 평론집을 한 번쯤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다들 알겠지만 대부분의 영화 개론서나 평론집에는 목차의 마지막에 책에서 언급된 영화 제목의 색인이 간략하게 가나다, 혹은 원제의 알파벳 순으로 함께 실려있다. 이 책에서는 그냥 단순한 영화의 색인에 앞서 ‘엔딩크레딧’이라는 재미있는 부록이 실려있는데, 거기에는 책에서 언급된 영화의 한국제목, 원제, 배우, 감독, 제작, 각본, 제작사 등의 메인스텝 리스트와 함께 DVD출시사의 정보까지 함께 간략하게 기재하고 있다.
그는 <공동경비구역JSA>를 만들기전까지 지금은 폐간되어 사라진 영화비평지 kino 등에 비평을 쓰기도 하고 매체에 출연하기도 하는 등 비평가 노릇을 했다. 현재의 박찬욱은 2000년부터 차근차근 자리를 잡고 인지도와 작품성을 쌓은 유명감독임이 분명하지만, 그 사실 이전에 그는 동아리친구들과 함께 고전영화를 보기 위해 프랑스문화원을 찾아가 비디오를 관람한 비디오세대, 고전영화광이다. 그런 그의 취향은 지금의 다른 젊은 감독들과 다르게 종로 낙원동에 자리잡은 ‘서울아트시네마ㅡ시네마테크’에서 열리는 작은 영화제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는 올해 영진위의 일방적인 공모와 관련된 일명 ‘시네마테크 사태’와 관련, 예술영화전용관 설립을 위해 다른 영화인들과 함께 맥주 광고(MAX)에도 모델로 참여한 것과 같은 맥락의 행동으로 보인다.
(맥주 max의 광고를 보면 봉준호,박찬욱,류승완 감독과 더불어 많은 배우들이 함께 한다. 이 것은 영진위의 일방적인 시네마테크 재공모 사태로 인한 아트시네마의 자립적인 운영을 위한 것으로, hite 맥주 회사에서 맥주 광고에 영화인들이 무상으로 출연하는 대신 전용관설립을 추진하기로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간략한 색인에서 그치지 않고, 스텝리스트를 포함한 dvd 출시정보까지 ‘엔딩크레딧’이라는 타이틀로 자신의 책에 함께 기재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치지직거리는 비디오를 보며 엔딩크레딧이 올라갔을 때의 그 심상을, 간략하게 나마 책에 기재하는 방식으로 영화 전체에 대한 예찬과 오마주를 바치는 형태로서.
<박찬욱의 오마주>는 쉽고 간단하다. 현학적인 수식어도 없고, 쓸데없이 긴 분량으로 하나의 영화를 소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르게 술술 읽어나갈 수 있는 형태의 글이다. 그렇지만 나도 이 책을 소장하고 있고, 전공자로서 재미있게 읽은 챕터도 상당하지만 책을 읽고 드는 전반적인 감상은 짤막한 그의 소개글을 온전히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본문에 나오는 모든 영화를 본 사람만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예를 들어 평소 내가 사랑하는 스페인의 귀염둥이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를 소개하는 글은 사전에 그 영화와 관련된 것들을 많이 찾아보았기 때문에 사전지식이 풍부해서 그의 글을 이해하는데에 전혀 장애물이 없었다. 영화 kika는 저예산의 영화이지만 유명한 디자이너인 폴 스미스나 장 폴 고티에 같은 디자이너들의 의상과 화려한 색체로 미장센이 비어보이지 않는다는 그의 견해에도 십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가 영화의 윤리학자라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무슨 훈계나 일삼는 고리타분한 도덕주의자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내 생각에는 세상에 윤리적이지 않은 영화란 없는데, 그건 <투캅스>나 <13일의 금요일>조차 그렇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전면에 드러나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다. 대개의 상업 영화들은 자기가 윤리 문제와 상관없는 척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상업영화서는 결격 사유 중 하나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대중은 윤리에 관계된 훈시를 몹시도 원한다. 어떤 교훈도 얻을 수 없는 영화는 어떤 재미도 주지 못하는 영화일 것이다. 키에슬로프스키의 영화는 윤리의 문제를 전반에 내세우고 있으면서도 그 어떤 교훈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르다. 정작 설교를 하는 쪽은 싸구려 오락영화들이지 키에슬로프스키는 아니다.
- <박찬욱의 오마주> 36p
위와 같은 글의 경우, 너무나도 일반적인, 영화의 성격을 가늠할 수 있는 영화들을 예로 들고 있기 때문에ㅡ투캅스나 13일의 금요일을 보지 않은 사람일 지라도 어떤 장르의, 어떤 성격의 영화일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ㅡ글을 읽고 공감하는데에 큰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래의 글을 보자.
(생략) 이 어찌 보면 불쌍한 아이들은 이제서야 자기네에 관한 구체적인 묘사를 얻게 된 셈이다. 마티외 카소비츠의 <증오>에 대한 미국식 응답으로 볼 수도 있는 이 영화에서, 그들은 타고난 악마가 아니며 잘못 인도된, 또는 그런 방식으로밖에는 계급 갈등을 폭발시킬 수 없는 궁지에 몰린 자들로 그려진다.‥‥‥(중략) 그런 면에서 또한 이것은 앨버트 휴즈와 앨런 휴즈의 <사회에의 위험>에 대한 백인식 응답이기도 하다.
<박찬욱의 오마주> 233p
위의 인용은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에 대해 쓴 글이다. 여기서 언급된 영화를 모두 보고 어떤 의미에서 쓰고 있는지 온전하게 파악할 수 있는 일반 독자는 몇 퍼센트나 될까? 물론 이 책을 찾아 읽는 사람이라면 박찬욱의 팬이거나, 영화에 관심이 있는 사람일 것이라는 전제는 분명하지만 위와 같은 반문을 지울 수는 없었다.
영화 현장에 있는 선배들이나 교수님들께 박찬욱감독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빠지지 않고 들었던 이야기는 박찬욱감독의 박식함에 대한 찬사였다. 그의 화법은 부드럽고, 가르치려는 태도 또한 보이지 않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시네필로서의 면모와 다독가로서의 그의 엄청난 박식함과 지식에 압도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그의 인문학, 철학적 시선을 조금씩 맛볼 수 있기에 즐거움도 느꼈지만 그와 함께 동시에 느낀 것은 작가의 머리속에 들어있는 ‘영화 라이브러리 목록’ 구경하기..라고나 할까. 물론 이 라이브러리는 위의 인용에서의 방식에서 처럼 스쳐지나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인터넷 검색이나 지인에게 물어보지 않는 이상, 영화를 보지 않고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는 그저 문자만 읽고 지나가는 것이 된다.
나는 이 책을 구입한 후에 내가 목차에 있는 영화를 보고 나서 짧은 리뷰를 읽어보는 식으로 책읽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지금은 이 책의 전체 글을 다 읽고 난 후에 쓰고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더 ‘공감의 읽기’가 불편한 것일지도 모른다.
항상 내게 부족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영화 많이 보기’ . 이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인데 학교에 치여 제작에 치여 이런저런 핑계로 전공자인데도 불구하고 영화보기를 너무 멀리하고 있었다. 이 것은 마치 조선시대의 선비가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어제는 기분이 안좋아서’ 책을 읽지 않고 과거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소리와도 같은 맥락이다. 이 책의 목차를 매번 훑어볼 때마다 반성한다. 아직 볼 영화가 많은데 넌 오늘도 게으름 속에서 무얼 하는 거냐고 스스로를 다그친다. 내게 이 책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파편적인 짧은 단상들의 연속이지만… 요즘 나를 괴롭히는 영화 읽기의 방식, 글을 ‘쓴다’ 라는 것의 문제, 영화에 대한 ‘열정’에 대한 재고…..
박찬욱이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궁금한 그의 팬이나,영화를 좋아하는 씨네필이라면 가볍게 한 챕터씩 읽어볼 만한 매력이 있는 책임은 분명하다. 단, 나처럼 모르는 영화가 나왔다고 해서 너무 괴로워하지 않는다면.
- 이 글은 ‘책읽기와 글쓰기’ 과제 제출로서 작성 되었습니다.
교수님! 한 학기동안 너무나도 유익하고 즐거웠습니다.
종강이 아쉬운 교양수업은 처음이에요.
2학기때도 또 듣고 싶지만 교양수업이 1,2로 나누어 있지는 않겠죠?
수고하셨습니다. :)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은 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근본적인 문제인 것이다. 그 밖에, 세계가 3차원으로 되어 있는가 어떤가, 이성의 범주가 아홉 가지인가 열두 가지인가 하는 문제는 그 다음일이다. 인생이 살 만한 보람이 없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것, 그것은 필경 하나의 진리이다. 그러나 너무나 자명하기에 아무 데도 쓸모없는 진리이다. 삶에 대한 이러한 모욕, 삶을 수렁으로 빠뜨리는 이런 부정은 과연 삶의 무의미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삶의 부조리는 과연 희망이라든가 자살 같은 길을 통해서 삶으로부터 벗어나길 요구하는 것일까? 이런 질문이야말로 모든 군더더기를 치워버리고 우선 밝히고 추적하고 해먕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참으로 인상적인 서문.
카뮈, 시지프의 신화
사실 나의 창작환경에서 지배적으로 작용하는 한가지의 요인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나의 창작환경은 어느 한가지의 요인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고 사소한, 인식하고 있지도 않았던 것들의 조합으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 아멜리에에서 아멜리에의 방>
나는 언제나 나만의 오롯한 공간을 갖기를 꿈꾼다.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주로 loser, 사회성이 다소 배제된 자신만의 세계에 탐닉하기를 즐기는 이들로 그려짐- 작은 다락방이나 아늑하게 꾸며진, 그 영화적인 공간이 내 것이었으면 하고 바란적이 한 두번이 아니다. 그러한 공간은 그 인물을 대변하고 그 인물의 행동,목적의 동기가 자라나는 욕망의 토양이 되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영화속의 인물들은 물론이요, 사람들은 그 사람의 방을 보고 그 사람의 성향과 성격을 파악하기도 하듯이)
그렇지만 내 방을 둘러보니, 현실은 시궁창이다. 누렇게 바래져버린 벽지의 색에는 몇 년동안 축적된 담배냄새가 베어나오고, 낡은 구옥빌라의 창틀은 열고 닫을 때 끼익끼익 소리를 낸다. 괴물의 비명과도 같이 들리는 끼익소리와 함께 외부의 소음과 바람은 모두 완전히 차단되지 못하고 낡은 창틀 사이로 온갖 동네 사람들의 소음과 바람이 섞여 들어온다. 창문은 창문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지어진지 25년이 훨씬 더 된, 내 나이보다도 더 낡은 구옥 빌라의 제일 작은 내방에 남는 공간은 내 몸 하나 뉘일 수 있을 만한, 1인용 작은 요자리 하나 필자리 정도. 이 집에 이사 올 때 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던 커다란 장식장은 버릴 수 없다는 엄마의 고집덕분에 작은 내 방에 붙박이처럼 한 벽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가구들로 꽉 차버린 내 방은, 영화 촬영과 회의들로 집에 들어갈 수 있는 날이 적어지자 점차 아빠와 동생의 컴퓨터방이 되어버렸다. 덕분에 안 그래도 노오랗던 벽지는 더욱더 노래지고 쾌쾌한 아저씨 냄새는 벽지에서 더욱더 심하게 배어나온다.
학교와 지하철로 2시간이 걸리는 서울 집에 가지 못할 때에는 주로 친구 집이나 남자친구 집에서 지내는데, 학교를 다니면서 이런 시간들이 많아지자 창작에 있어 공간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로망이나 집착의 정도는 점점 옅어져갔다. 점점 공간의 의미는 내게 있어 ‘창작’의 의미보다는 ‘휴식’의 의미가 더 크게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간이 주는 아늑함이나 인테리어의 느낌, 가구의 배치 등과 같은 요소 보다는 그 공간에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함께 그 공간에 있는 사람의 친밀도가 창작에 있어 더 중요한 요소가 된 것 같다.
영화 작업을 하다보면 낯선 공간에서 무언가 – 영화 소품이나 아이디어 회의 등 – 를 만들고 창작하는 일이 많아진다. 그 공간이 처음 가보는 지방의 한 폐가라고 할지라도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곳에서 그 시간에 그 작업을 완료해야 한다면 하는 수 없는 일이다. 영화라는 작업의 특성상 공간에 대한 느낌, 낯설고 익숙하고의 여부나 특정한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자신만의 조건을 충족시키기에는 힘든 공간에서 작업을 해야 할 때도 많은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공간이 주는 영감이나 나만의 조건 등을 완전히 만들기도 전에 그 것들에 대한 나의 로망에 대한 밀도를 나도 모르게 옅어지게 만든 것 같다. 대신에 공간에 함께하는 ‘무생물’ 의 존재 대신 ‘살아있는’ 존재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공간에 있는 사람이 나와 어느 정도 친밀한지, 나의 가치관과 상극인 생각을 갖고 있는지 정도에 대한 여부가 더욱 중요하게 작용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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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타자기, 내가 유영할 수 있게 해주는. 나의 영화.
가끔 글도 안 써지고, 아무것도 하기 싫은 무기력감에 넉다운 되어 나 스스로 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 관계들, 가치들, 지식 이 모든 것들이 무가치하게 느껴지고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아무런 의지도, 의욕도 생기지 않을 때. 창작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삶 그 자체가 무기력할 때 말이다.
2006년의 어느 무렵, 나는 바닥의 끝도 보이지 않는 무기력에 무장해제 되어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두 달이 넘도록 집 밖에도 나갈 수 없었고 3일 밤을 넘도록 잠도 잘 수 없었다. 지독한 우울증과 무기력증이었다. 그 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생산적인 행동은 생활과 밀착되지 않은 내용의 책 – 니체, 보들레르, 알모도바르 감독의 자서전 등 -을 읽거나 아무도 없는 집안 거실에 혼자 이불을 똘똘 말고 누워 티비로 영화를 보는 것 뿐 이었다. 책 읽기도 귀찮고 아무런 힘도 의욕도 없던 어느 날, 예전에 한 친구가 권해준 영화를 틀었다. 레오까락스의 ‘나쁜 피’ (Mauvais Sang) 였다. 그 영화를 보는 도중, 실로 오랜만에 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환희의 감정이었다. 이 영화의 네러티브는 형편이 없다. 그렇지만 네러티브외에 그 모든 형식. 그리고 내가 마주한 영화와 나의 그 오롯한 마주침! 나는 영화를 보며 내가 알지 못하는 어느 공간, 어느 순간의 공기 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영화를 만나 어느 순간을 유영하고 4일 만에 잠이 들었다. 정말 꿀 같은 잠이었다. 항상 나는 삶이 무기력하고 머릿 속에 아무런 이야기도, 욕망도 없을 때에는 내가 영화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던 그 순간을 생각하며 레오까락스의 ‘나쁜 피’를 본다. 나의 타자기는 다름이 아닌 영화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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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나쁜피의 유명한 한 장면, 데이빗 보위의 모던러브에 맞춰 뛰어가는 드니 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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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영감을 주는 것들
나는 자리에 앉아 엉덩이를 붙이고 글을 쓰려고 하면 영감은 잘 떠오르지 않는 타입이다. 영화감독 봉준호는 그림 한 장 만으로 살인의 추억의 이야기를 떠올려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나는 한 장의 그림이나 사진으로 이야기 전체를 떠올릴만한 영감은 떠오르지 않고, 그저 하나의 인상적인 이미지로 머릿 속에 남겨두는 스타일이다.
커다란 영감이 떠오를 때는 동적으로 계속해서 한 공간에 머무르기 보다는 주로 걷거나 버스 안에서 이동할 때 창밖에 보이는 작은 풍경에서 온다. 길을 걷다 발견한 밑동이 잘려진 나무 옆에 버려진 다 망가진 통기타, 횡단보도 앞에서 나물장사를 하는 할머니의 알록달록한 대야의 색깔과 할머니의 손 때묻은 전대, 도로변에 플랜카드와 함께 휘날리는 한 벌에 7000원짜리 할머니 원피스의 치마 자락, 땀으로 범벅이 된 채 배낭을 메고 길을 걸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청년의 얼굴, 깜깜한 논길 위에 혼자 깜빡이는 불빛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것들로 영감이 내게 찾아오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 영감을 스스로 찾기 위해 하는 행동들도 있다. 관찰하려는 노력인데,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갈 때 지하철 안에 있는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커피숍에 혼자 앉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이들을 관찰하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사람을 관찰할 때는 주로 신발을 본다. 신발을 보면 그 사람의 경제적 위치나 생활태도 등을 알 수 있다. 실용적인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인지, 뒤축이 어떻게 얼마나 까졌는지…
신발부터 시작해서 얼굴로, 아래에서 위로 관찰하는데 가끔은 사연을 묻고 싶을 정도로 궁금한 표정의 사람이나 말을 걸고 싶을 정도로 궁금한 사람들도 한 둘 마주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커다란 영감의 요소는 ‘ 꿈’ 이다.
요즘에는 꿈을 자주 꾸지 않아서 아쉽지만, 꿈을 꾸면 나는 주로 현실적인 이야기의 꿈보다는 장르적으로 말하자면 s.f나 판타지 모험물에 가까운 꿈을 꾸곤 한다. 그래서 꿈은 대부분 따로 노트에 대충이라도 기입해 두는 편이다. 그렇지만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꿈의 이야기와 이미지들을 영화로 풀어내기엔 돈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 ‘내가 소설가라면 활자로 꿈의 이미지와 이야기들을 풀어 재미있는 하나의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도 종종 한다. 재미있는 꿈을 자주 꾸면 좋을 텐데, 요즘에는 꿈을 자주 꾸지도 않을 뿐더러 나는 꿈을 꾸면 흑백이 아닌 컬러의 꿈을 꿔서 자고 일어나면 좀 피곤하다. 역시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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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근히 까탈스러운 여자 – 도구의 조건, 날씨의 영향
나는 주로 맑은 날에는 글을 잘 쓰지 않는다. 화창하게 맑은 날의 공기 내음은 계절을 내게 환기시켜줘서 그 공기내음을 맡으면 기분이 좋아지지만, 아쉽게도 기분이 잠시 좋아지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맑고 화창한 날보다는 주로 국지성호우가 쏟아지는 날이나 심한 황사가 부는 날같은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글이 잘 써지고 무언가 영감이 떠오르는 것 같다. 에너지를 플러스와 마이너스로 나누자면 나는 마이너스의 에너지, negative한 에너지가 창작의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라서 그런지 맑은 날, 유쾌한 날에는 글이 잘 써지지 않고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유쾌하기 보다는 조금 예민한 기분에서 글을 쓰는 편이다.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창조하는 예술가라면 음악,미술,글,영화 어떤 분야에 있는 사람이든 바닥을 치고 올라온 경험이 있어야 한다고 항상 생각하는 태도가 날씨에도 반영이 어느정도 되어 있는 것 같다. 기분좋고 방방 뜬 유쾌한 날씨보다는 스스로에게 침작할 수 있는, 촉수가 뾰족뾰족 설 수 있는 날에 무언가가 창작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창작환경에서 날씨외에 사소한 습관들과 도구들을 돌이켜보자. 없으면 절대 무언가를 창작할 수 없다고 까지 말할 수는 없는 것들이지만 있으면 내게 좋은 도구들이 있다.
이건 학교를 들어오면서 조금 그 집착의 정도가 나아졌는데, 예전에 시간이 많을 때는 항상 포켓북이나 수첩, 노트를 사고 표지를 손으로 꾸며서 써야 직성이 풀렸다. 손으로 꾸미고 쓰지 않으면 그저 공장에서 찍혀져 나온 상품을 내가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였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어서, 손으로 꾸며야만 비로소 진정한 내 것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집착 때문에 마음에 드는 포켓북이나 수첩, 노트를 수도 없이 산 것 같다. 아직도 집에는 겉표지만 어설프게 꾸미다가만 수첩도 많고, 새로 사 놓고 앞에 몇 페이지만 쓰고 관둔 노트와 수첩들이 굴러다닌다.
(디카는 a.s 맡겼고 핸드폰 카메라마저 고장이 나서 사진을 찍을 수 없기에 안타깝다)
다이어리에는 주로 단편적인 생각을 완전한 문장이 아닌 단어의 조합으로 기록해 놓고, 내가 좋아하는 글귀나 시를 적어서 보는 용도로 쓴다. 그 외에는 플래너로서의 역할이 강한데 사진이 있거나 일러스트가 있는 다이어리는 절대 쓰지 않는다. 그리고 다이어리를 쓰다가 날짜를 잘못 쓰거나, 살 때는 안 그랬는데 쓰다가 그 다이어리의 사소한 어떤 요인 ( 월간에 주간이 너무 작다든지) 이 마음에 안 들기 시작하면 그 다이어리에는 그 이후로 아무 것도 쓰지 않게 된다. 그래서 올해에도 다이어리를 3월에 새로 바꿨다.
주변이 너무 깨끗하면 글을 잘 쓸 수가 없다. 그리고 주변이 아무리 깨끗하다고 해도 내가 무언가 작업을 시작하면 주변은 너저분해지기 일수라서, 깨끗해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된다. 또,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하거나 수첩에 글을 쓰거나 어떤 일을 해도 이불위에 앉거나 엎드린 상태에서 하는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앉은 자리의 주변에는 나를 중심으로 동그랗게 온갖 것들이 널부러지게 된다. 내 주변이 너무 깨끗하면, 작업할 준비가 안 된듯한 느낌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주변을 어지르게 되는 것 같다.
집에 데스크탑이 있지만 데스크탑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주로 내가 사용하는 노트북은 10인치 작은 넷북이다. 이 것으로 타이핑과 웹서핑, 영화감상을 모두 한다. 데스크탑으로 작업을 하면 엄마의 처녀적 옷을 입고 외출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어색하고 민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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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이 잘 되지 않으면?
집중이 잘 되지 않을 때에는 A4사이즈 이상의 연습장에 음악을 들으며 그림을 그린다. 그냥 내 손을 보고 손그림을 그릴 때도 있고, 주로 잡지의 사진을 보고 비슷하게 따라 그리는 일을 한다. 잡지에서 마음에 드는 그림이나 사진을 찾지 못하면 갖고 있는 책 중에 60년대 출판 광고물에 대한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나온 미국 60년대 광고 그림을 따라 그리거나 좋아하는 만화책의 주인공을 따라 그리기도 한다.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따라 그리면 마음이 차분해지고, 쓸데없을지라도 무언가에 집중하는 기분이 들어서 괜히 생산적인 일을 하는 듯한 기분이 들어 자기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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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창작환경을 돌이켜보니 나는 생각보다 참 까다로운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저런 많은 요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왜 이러고 있는가? 에 대한 반문도 스스로에게 던져본다. 그리고 요즘 집에 자주 들어가지 못해서 창작보다는 휴식만 하고 있지 않았나 하는 스스로의 반성도 해보고.. 사진을 찍어서 올렸으면 더 좋았을 텐데. 나중에 시간이 나면 수첩들과 내 낙서의 흔적들, 길을 가다 찍은 사진들도 올려봐야겠다.